“우리들 청년이 묵시할 시대가 아니다. 서로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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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서(序)
“우리들 청년이 묵시할 시대가 아니다. 서로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
이와 같이 부르짖은 자는 29세의 유갑순(柳甲順)이라는 과격의 청년이다. 원적(原籍)은 강화부 화도면 덕포리다.
그의 부(父) 유성보(柳成甫)는 양반계급으로 한학을 공부한 지역의 명망가였으나, 태생이 완고하여 일본의 신정(新政)을 지극히 반대하는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가정에는 매일매일 원차(怨嗟, 원망하고 탄식함)의 말을 가장으로부터 듣고 하여 자연히 가족도 그 기분으로 되는 것이다.
이와 같아서 상속인 유갑순은 대정(大正) 8년(1919년) 전부터 경찰의 미행 요시찰(要視察) 대상이었다. 가문을 자랑하는 부친의 우월감은 일찍 요절함으로 끝이 났고, 유갑순은 서당에서 한문을 깨치고, 사립고등보통학교를 다녔으며, 경성에 올라와 교원양성소인 경성학원을 전전한 후 강원도 평강군 남면 정연리에서 배일(背日)운동가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교통국 요원으로 활동하며 일층 나쁘게 되어 이래(以來) 사상주의적 연구에 있어서 배일서적만 탐독하더니 괴이한 성격으로 변해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점점 더 조선의 악습에 젖어서 울적한 불평, 그러고 선각자로 자임하며, 경성과 외지를 돌면서 독립군자금 모집단을 조직하였다.
그러한 조직의 영수격으로서 수 인(人)들을 규합하고 군자금 모집에 적극 나선 유(柳)는 경찰의 주목을 받았다. 대정 9년(1920년) 임시정부 교통국 소속 이원직 일파를 검거하였는데 유도 일원이었다. 유는 상당한 지위에 있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그 목적을 실현할 방법으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도순사(道巡査)가 되어 배일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소속 고등경찰관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는 유갑순을 체포하고 위와 같이 기록했다. 미와 경부(警部)는 유갑순 이외에도 무수한 독립지사들을 체포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자다. 그가 근무한 종로경찰서는 일개 경찰서의 업무 외에도 특별히 전 조선의 사상범을 다루는 총본산이었고, 미와 경부는 그곳 고등계 형사들의 대표 격이었다.
일제가 이 땅에 야만정책을 36년간이나 지속할 수 있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 소속 경찰들의 이러한 공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실상 일본이 우리 민족의 원수가 된 데는 그 책임이 이들 일본인 경찰과 그 부하로 맹종하던 조선인 경찰관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본인 경찰이나 그들과 결탁한 조선인 경찰의 삼엄한 감시 아래서도 독립군의 임무를 태연하게 이어 갔던 유갑순의 호기(豪氣)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비치된 일본인 고등경찰관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의 보고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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