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으로 영원히 산 유 열사 큰 뜻 받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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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갑순 열사는 1892년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선친 유성보(柳成甫)는 지역의 명망가로서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이 투철한 한학자이셨으므로 나라 잃은 암울한 시대를 걱정하는 가풍이 유 씨 집안의 분위기요 자존심이셨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유 열사는 유년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신학문을 접하기 위해 서울 경성으로 유학하여 교원과정을 이수하고, 강원도 정연리에 있는 합성의숙(合成義塾)에서 5년간 후학 양성에 힘쓰셨습니다. 교육을 통해 후학들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으나 일제가 행한 부당한 교육령이 후학들의 꿈을 앗아가는 현장을 목도하고 분연히 일어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도순사가 되어 경찰관교습소에 들어가 동료들을 독립운동원으로 규합하는 등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산하 경성 교통국 재무부장으로서 국내에서 독립신문, 임시정부 관보 등을 배포하는 임무는 물론, 국내 독립운동 단체 및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 조달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더욱 치밀하게 감시망을 조이면서 많은 우국지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기 시작하였는데, 유 열사는 1921년 3월 11일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취조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그의 꽃다운 나이 29세였습니다.
우리의 유갑순 열사는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던 조국 이 강토를 남기시고 떠나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나라사랑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유갑순 열사님은 갔지마는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유갑순 열사님을 휩싸고 돕니다.
유갑순 열사를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대입하여 보았습니다. 유 열사는 29년의 생애 속에서 오로지 옳은 일을 위하여 가시밭길이라도 참고 갔습니다. 그 일이 칼날에 올라서는 일이라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가시밭길을 걷고 칼날 위에 서는 데서 정의를 위해 자기가 싸운다는 통쾌함을 오롯이 느끼는 애국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 열사의 애국심, 죽음의 순간도 두려움 없이 기쁨으로 받아들였던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을 우리 후손들이 길이길이 따르고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의 독립이란 높은 가치 앞에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같이 버
려 순국함으로써 영원히 살고자 한 유 열사의 큰 뜻을 받들고 그 대열에 우리 모두 함께합시다. 그 길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의 길이요, 우리 모두 뒤따라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현창하고자 발족한
독립운동유갑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의 <유갑순 열사 일대기> 출간을 축하하며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전보삼 만해기념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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